그래서 식구들을 데리고 차를 몰고 남산으로 향했죠. 그런데 네비게이션에 찍힌 남산 식물원에 도착하여 동태를 살펴보니 어릴때 보던 그런 풍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 안내하는 아저씨께 여쭤봤죠.
"여기 온실로 된 식물원 있지 않았나요?"
그랬더니 아저씨 하는말...
"그 식물원은 없어진지 10년도 넘었는데요? 지금은 야외 식물원밖에 없어요."
허걱입니다. 그래도 서울 살이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남산 식물원이 없어진지도 몰랐다니... 쩝...
그래서 절망에 빠졌는데 순간 떠오른 생각... 예전에 남산 성곽길을 걷다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공사를 하는 걸 보았는데 이제 공사가 끝났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산 식물원에서 그곳까지는 1Km도 채 되지 않습니다. 남산 도서관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냥 추위를 피해서 온 나들이였는데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갑자기 행선지가 변경되어 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와야 하는 곳인데요... 우연한 기회에 오게된 곳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참 많은 감회가 든 곳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원래 1970년에 이 자리에 지어졌다가 건물이 낡아서 허물고 2010년에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나즈막한 건물입니다.
기념관 입구로 들어가는 한쪽 벽에는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벽에 조각되어 있어 절로 숙연해 집니다.
들어서자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조각상과 혈서로 대한독립을 쓴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 중 하나입니다. 조국의 독립되면 그곳으로 묘를 옮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유언은 아직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효창공원에 독립 열사들의 묘를 모두 조성했는데 안중근 의사의 시신만은 찾지를 못해서 현재 가묘의 상태로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있는 대단한 가족들입니다. 가족들과 그들의 독립운동의 노력들을 정리해 놓은 전시물입니다. 안중근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도마 안중근이라고 할 때 도마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의미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릴 때 모습을 담은 애니메이션을 아들이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안 의사의 아명이 "응칠"이였더군요.
안중근 의사는 지식이자 교육자이기도 하였지만 무장항쟁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는 독립군의 장교로서 크고 작은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쓰라린 패전을 경험하게 되고 좌절에 빠진 동지들을 모아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의 상징인 약지가 잘린 손바닥 낙관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동의단지회는 12명의 결사대로 구성되고 이들이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 작전에 가담하게 됩니다.
동의단지회 동지들이 손가락을 잘라 모은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썼습니다. 이 혈서를 보면서 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잊지 않았을 겁니다.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는지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왜 안 의사가 손가락을 잘랐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삭발을 하거나 단식투쟁을 하는 정도의 결의를 보여주는 행동인데 그 당시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요?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단호한 결의가 필요했다는 의미일 테지요. 여하튼 이걸 설명하기가 참 어렵더군요.
기념관은 시간 순서대로 전시물이 배치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좋았습니다. 드디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장면입니다. 인형으로 세밀하게 묘사를 해 두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 통감으로서 일본 제국에 의한 조선침탈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군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적군의 수장이므로 사살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일본에 의해서 침략당하고 지배받은 여러 민족들이 저항운동을 했지만... 사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가장 큰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 사건은 전세계의 언론에 대서특필 됩니다.
하지만 이 거사가 일어난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는데 이후로도 35년간 일본 제국주의는 그 위세를 떨치게 되니 한명의 지도자를 제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점에서 전략적 실패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지만 당시의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이렇게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 거사를 성공한 것 자체가 큰 의미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거사가 이후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구요.
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 법정에 넘겨져 재판을 받습니다. 사형이라는 최고형은 변함이 없지만 일본은 우발적인 테러리즘으로 몰아갔고 안중근은 독립군의 장교로서 전투의 결과로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그는 평소의 지론이었던 "동양평화론"을 설파하는데 이 이론은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삼국이 군사, 경제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서양 열강의 침탈에 맞써 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럽연합과 거의 비슷한 구상이어서 참으로 선구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제국주의적인 침탈 보다는 평화가 우선되어야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상대국을 침탈하여 평화를 깨뜨렸으므로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그래서 자신이 처단을 했다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 형제들과 신부님 입회하에 여러가지 유언을 남깁니다. 동포들에게 고하는 유언으로 무장 투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힘을 키우라는 조언을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부인에게도 애틋한 유서를 남깁니다. 장남 분도를 신부로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하지만 아들 분도는 7살때 일본의 밀정에 의해 독살되는 비운을 겪습니다. 사실 안중근 의사 가족 거의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또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은 저도 잘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는지는 사실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두어 시간 찬찬히 둘러보면서 그의 숭고했던 희생정신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대범한 구상에 대해 알게 되어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아들에게 여러 좋은 얘기를 해 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구속되고 재판 받으며 사형이 되는 날까지 옥에 있으면서 200여점의 유묵을 남깁니다. 이 유묵들에는 안중근 의사의 상징인 단지 낙관이 찍혀있어 참 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보물들입니다.
기념관의 마지막은 유묵들의 사본들이 전시되어 있어 하나하나 뜻을 새겨가며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이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이 가슴에 와 닿더군요.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 유묵은 뤼순감옥에서 법정을 오갈 때 경호를 맡은 일본군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써 준 것이라고 합니다.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진과 유묵을 모셔놓고 매일 절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에는 부인과 딸이 이어서 계속 이어서 모시다가 1980년 우리나라에 기증한 뜻 깊은 유묵입니다. 적군의 군인에게 "나라를 위해 몸바치라"는 글을 내린 그의 뜻이 참 큽니다.
유묵 중에서 목수와 관련된 것이 있어 관심을 끕니다.
용공난용연포기재, "서투른 목수는 몇 아름드리 기이한 재목을 다루기 어렵다" 무슨 뜻인지 소인배는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흥미롭게 꼼꼼하게 둘러보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코스의 끝부분에는 햇볕이 잘 드는 온실처럼 된 공간이 있더군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서 우리의 지금이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된 것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 같은 훌륭한 분들이 역사를 바꾸어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뉴스 매체들에서 교학사 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럽더군요. 다른걸 떠나서 이 교학사 교과서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문장이라고 합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라구요.
다른 역사 교과서들은 안중근의 의연한 법정진술, 그의 동양평화론에 대해서 10~20여줄 설명한 것에 비하면 너무도 간단합니다. 어떤 가치판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기술된 이 한 줄로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역사적 맥락과 그의 의도에 대한 이해없이 사살 행위 자체로만 안중근 의사를 바라보면 학생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소중하게 지켜온 가치들이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게 눈 부릅뜨고 잘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여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들러서 많은 얘기를 나눠보기를 권해 드립니다.
허걱입니다. 그래도 서울 살이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남산 식물원이 없어진지도 몰랐다니... 쩝...
그래서 절망에 빠졌는데 순간 떠오른 생각... 예전에 남산 성곽길을 걷다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공사를 하는 걸 보았는데 이제 공사가 끝났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산 식물원에서 그곳까지는 1Km도 채 되지 않습니다. 남산 도서관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냥 추위를 피해서 온 나들이였는데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갑자기 행선지가 변경되어 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와야 하는 곳인데요... 우연한 기회에 오게된 곳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참 많은 감회가 든 곳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원래 1970년에 이 자리에 지어졌다가 건물이 낡아서 허물고 2010년에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나즈막한 건물입니다.
기념관 입구로 들어가는 한쪽 벽에는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벽에 조각되어 있어 절로 숙연해 집니다.
들어서자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조각상과 혈서로 대한독립을 쓴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 중 하나입니다. 조국의 독립되면 그곳으로 묘를 옮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유언은 아직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효창공원에 독립 열사들의 묘를 모두 조성했는데 안중근 의사의 시신만은 찾지를 못해서 현재 가묘의 상태로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있는 대단한 가족들입니다. 가족들과 그들의 독립운동의 노력들을 정리해 놓은 전시물입니다. 안중근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도마 안중근이라고 할 때 도마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의미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릴 때 모습을 담은 애니메이션을 아들이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안 의사의 아명이 "응칠"이였더군요.
안중근 의사는 지식이자 교육자이기도 하였지만 무장항쟁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는 독립군의 장교로서 크고 작은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쓰라린 패전을 경험하게 되고 좌절에 빠진 동지들을 모아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의 상징인 약지가 잘린 손바닥 낙관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동의단지회는 12명의 결사대로 구성되고 이들이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 작전에 가담하게 됩니다.
동의단지회 동지들이 손가락을 잘라 모은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썼습니다. 이 혈서를 보면서 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잊지 않았을 겁니다.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는지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왜 안 의사가 손가락을 잘랐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삭발을 하거나 단식투쟁을 하는 정도의 결의를 보여주는 행동인데 그 당시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요?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단호한 결의가 필요했다는 의미일 테지요. 여하튼 이걸 설명하기가 참 어렵더군요.
기념관은 시간 순서대로 전시물이 배치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좋았습니다. 드디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장면입니다. 인형으로 세밀하게 묘사를 해 두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 통감으로서 일본 제국에 의한 조선침탈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군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적군의 수장이므로 사살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일본에 의해서 침략당하고 지배받은 여러 민족들이 저항운동을 했지만... 사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가장 큰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 사건은 전세계의 언론에 대서특필 됩니다.
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 법정에 넘겨져 재판을 받습니다. 사형이라는 최고형은 변함이 없지만 일본은 우발적인 테러리즘으로 몰아갔고 안중근은 독립군의 장교로서 전투의 결과로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그는 평소의 지론이었던 "동양평화론"을 설파하는데 이 이론은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삼국이 군사, 경제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서양 열강의 침탈에 맞써 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럽연합과 거의 비슷한 구상이어서 참으로 선구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제국주의적인 침탈 보다는 평화가 우선되어야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상대국을 침탈하여 평화를 깨뜨렸으므로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그래서 자신이 처단을 했다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 형제들과 신부님 입회하에 여러가지 유언을 남깁니다. 동포들에게 고하는 유언으로 무장 투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힘을 키우라는 조언을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부인에게도 애틋한 유서를 남깁니다. 장남 분도를 신부로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하지만 아들 분도는 7살때 일본의 밀정에 의해 독살되는 비운을 겪습니다. 사실 안중근 의사 가족 거의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또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은 저도 잘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는지는 사실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두어 시간 찬찬히 둘러보면서 그의 숭고했던 희생정신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대범한 구상에 대해 알게 되어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아들에게 여러 좋은 얘기를 해 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구속되고 재판 받으며 사형이 되는 날까지 옥에 있으면서 200여점의 유묵을 남깁니다. 이 유묵들에는 안중근 의사의 상징인 단지 낙관이 찍혀있어 참 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보물들입니다.
기념관의 마지막은 유묵들의 사본들이 전시되어 있어 하나하나 뜻을 새겨가며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이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이 가슴에 와 닿더군요.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 유묵은 뤼순감옥에서 법정을 오갈 때 경호를 맡은 일본군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써 준 것이라고 합니다.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진과 유묵을 모셔놓고 매일 절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에는 부인과 딸이 이어서 계속 이어서 모시다가 1980년 우리나라에 기증한 뜻 깊은 유묵입니다. 적군의 군인에게 "나라를 위해 몸바치라"는 글을 내린 그의 뜻이 참 큽니다.
유묵 중에서 목수와 관련된 것이 있어 관심을 끕니다.
용공난용연포기재, "서투른 목수는 몇 아름드리 기이한 재목을 다루기 어렵다" 무슨 뜻인지 소인배는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흥미롭게 꼼꼼하게 둘러보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코스의 끝부분에는 햇볕이 잘 드는 온실처럼 된 공간이 있더군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서 우리의 지금이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된 것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 같은 훌륭한 분들이 역사를 바꾸어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뉴스 매체들에서 교학사 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럽더군요. 다른걸 떠나서 이 교학사 교과서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문장이라고 합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라구요.
다른 역사 교과서들은 안중근의 의연한 법정진술, 그의 동양평화론에 대해서 10~20여줄 설명한 것에 비하면 너무도 간단합니다. 어떤 가치판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기술된 이 한 줄로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역사적 맥락과 그의 의도에 대한 이해없이 사살 행위 자체로만 안중근 의사를 바라보면 학생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소중하게 지켜온 가치들이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게 눈 부릅뜨고 잘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여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들러서 많은 얘기를 나눠보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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