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다 보면 그 앞에 또 다른 박물관을 짓고 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공사현장명이 "한글박물관"이더군요.
아들이 한글을 다섯살때 깨쳤는데, 그때 이 한글박물관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픈을 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2014년 10월 9일 한글날, 드디어 한글박물관이 개관을 했습니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진 적도 있었고, 국어보다 영어를 더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한데다가, 우리 민족 최고의 문화유산인 한글에 대한 제대로 된 전시공간이 없었다는 점에서 참 안타까웠는데, 늦었지만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개관 초기의 어수선함이 끝날 즈음인 2014년 12월 초에 식구들과 함께 한글박물관을 다녀온 기록을 남깁니다. 덥고 추운 방학 때 아이들과 함께 가 볼만한 곳이라 추천드립니다.
한글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한켠에 지어졌습니다만 입구도 주차장도 다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만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사이에 있습니다. 주차장 규모는 그리 크지 않던데, 만일 만차가 되면 옆에 있는 용산가족공원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차를 대고 걸어가도 될만한 거리입니다. 사실 이 세 곳은 담장없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메인 전시관은 2층에 있습니다. 2층에 들어서니 김소월의 <산유화>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아들은 한자 한자 읽어보며 시를 음미하는 건지, 글자를 음미하는 건지, 하여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끝에 가면서 글자들이 합쳐지고 뭉개지는게 재밌나 봅니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한글은 조형미가 뛰어난 문자라고 합니다. 알파벳에 비해 다양하고 개성있는 서체가 개발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 한글박물관에는 한글을 이용한 설치미술 작품이 꽤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한글이 회오리쳐 오르는 모양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 사후, 보급에 대한 드라이브가 약해지고 천시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쉬운 문자라는 파괴력은 하층 민중과 배우지 못한 여성층의 표현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글자라는 건 굉장한 축복입니다. 아이에게 우리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라고 물어 보세요.
해방이 되고 학교에서 우리글을 가르쳐야 하는데 선생님이 부족했겠지요. "일본글은 알아도 우리글은 몰나요"라는 직설적인 카피가 참 와닿습니다. 대단한 전단지입니다.
지도 좀 본다는 아들이 이 오래된 아프리카 지도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조선과 중국이 아니면 모조리 다 "오랑캐땅"이라는 호기가 재미있네요. 외국땅의 이름을 전해듣고 그를 한글로 최초로 옮긴 것을 터입니다. 이즙드국, 마다가스가국, 소마리, 모라고국 등의 이름이 재밌습니다.
한글이 없었다면 이런 아름다운 문학작품도, 이런 삼류소설도 민중들이 접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활자화된 문화유산은 쌓이고 쌓여서 그 깊이와 너비가 커집니다.
훈민정음이 어떻게 인쇄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프리젠테이션입니다. 바닥에 영사를 해서 더 재밌네요.
예전에 이런거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책자의 형태이지만 실제로는 실이나 헝겊조각을 보관하는 "손그릇"입니다. 아녀자들이 참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한글 금속활자입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완성형 서체네요. 이렇게 하면 많은 수의 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전에 컴퓨터에서 한글을 표현할 때 조합형으로 할거냐 완성형으로 할거냐라는 논쟁이 떠오릅니다. 기술이 발전되고 리소스가 축적되니, 이제는 완성형으로 미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추세가 되었지요.
한글은 자모의 수가 적어서 기계화하기 쉽습니다. 알파벳과 다른 점은 초성 중성 종성이 있어 타점의 위치를 구분해야 하는 정도입니다. 저도 군대에 있을 때 타자기를 1년 정도 썼었는데, 1년 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그 뒤로는 워드 프로세서를 썼었죠. 그때 이벌식 타자기를 쓰면서 손가락 끝에 느꼈던 그 타격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켠에는 이 타자기를 직접 쳐볼 수 있게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데, 타자 잉크가 다 말라 버려서 제대로 글자가 찍히질 않더군요. 아이들이 참 좋아할 코너인데 아쉬웠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특이한 모양의 벤치가 많습니다. 이 벤치는 자작합판을 밴딩하여 물결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아이가 너무 좋아합니다.
명성황후의 친필 편지라고 합니다. 흘려써서 읽기가 좀 힘든데 가지런한 서체가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렇게 인쇄된 편지지가 있었다는게 놀랍네요.
마법천자문을 좋아하는 아들이 이 천자문을 보고 좋아합니다. 이렇게 색종이에 인쇄된 천자문이라면 친구들에게 꽤나 부러움을 샀겠습니다.
한글의 조합 원리를 알려주는 곳입니다. 곡면 스크린에 조합 원리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흥미롭게 보고 있네요.
아이들에게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키오스크입니다. 사실 이곳이 가장 교육적인 곳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들도 한글 자모의 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습니다.
한글의 자모는 사람의 발성기관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는 백정이 동물을 해부해서 그 발성기관의 모양을 세종대왕에게 알려주었다는 에피소드가 나오지요.
o은 목구멍의 둥근 모양이라고 아들이 얘기한 적이 있는데, 맞더군요. 저는 그냥 공백을 추상화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적은 수의 자모로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자음과 모음의 배열에 있지요. 아마도 외국인들이 한글을 접할 때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글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훈민정음 혜례본"이지요. 한글의 창제원리에 대해 한자로 풀이한 책입니다. 어떤 문자의 창제 원리에 대해 밝힌 책은 이 훈민정음 혜례본이 세계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훈민정음 혜례본은 인쇄된 것인데 딱 두개의 본만 전해져 옵니다. 하나는 간송선생이 일제시대에 어렵게 구한 것으로 작년 간송문화전할 때 원본을 유리창 너머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인 상주본은 인간들의 욕심으로 현재 실종된 상태지요. 빨리 국가에서 회수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공간은 한글이 겪어온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인형으로 표현한 곳입니다. 그런데 너무 높이 설치되어 있어, 정작 아이들은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배려하여 좀 더 아래에 배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지요. 엄혹한 일제시대인 1926년, 조선어연구회 등이 한글 창제 480주년을 기념하여 음력 9월 29일에 "가갸날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후 간송 선생이 훈민정음 혜례본을 입수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니 한글의 창제일이 음력 9월 초순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한글날이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이 된 것입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 선생이 붙였다고 하네요.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입니다. 물론 세종대왕 혼자 만든 것은 아니겠지요. 많은 학자들과 함께 연구한 공동 저작물일 겁니다. 하지만 당시 한글을 만든다고 할 때 부딪혔던 거쎈 기득권층들의 반발을 생각하면, 세종대왕의 굽히지 않는 소신과 부드러운 포용으로 그들을 설득하는 리더쉽이 한글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3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여기는 세종대왕 한글 문화 시대를 열다라는 기획전을 하고 있네요.
"타임머신-통로"라는 작품인데, 세종기지에서 빙하의 층으로 지구 역사를 살펴보는 연구에 영감을 받아 세종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계를 만든 거라고 하네요. 미술은 상상이고 창의입니다. ^^
종묘의 정전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채집하여 스피커로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식구도 비 올때 종묘에 간 적이 있어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처마끝에 매달려 내려오는 빗물이 참 인상적이었죠.
옛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들입니다. 특이하고 인상적입니다.
들어가 구경하고 싶게 만들어 놓고 들어가지 말랍니다. 뭔가 재밌는 장치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아마 남극을 표현한 것 같은데, 저 안에 조그만 깃발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람에 흔들립니다. 예술인들의 정신세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한글로 장식된 커튼입니다. 이거 외국인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빛이 비추는 강목 재질에 손글씨라 더욱 더 정감이 갑니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기둥에 글자를 새기고 아이들이 칠하고 꾸민 작품입니다. 일종의 집단창작인가요? 이런 작품은 다양한 디테일이 재밌습니다.
이 작품도 인상적입니다. 목판본을 현대적인 서체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인데 활자와 그를 보관하는 틀입니다. 이런식으로 활자를 정리하고 찾고 판본을 만든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요.
밖으로 나오니 자작나무 합판에 CNC로 카빙한 세계지도가 나옵니다. 지도에 관심이 많은 아이가 당연히 좋아하지요.
잠시 쉬는데 벤치의 모양이 범상치 않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니 한글 자음의 모양을 이용하여 벤치를 만들었네요. 아들과 함께 세가지를 찾았는데 아마 더 있을 겁니다. 재밌는 아이디어이고 기발한 작품입니다.
잠시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합니다. 박물관 내부에 아름누리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한글박물관 내의 카페답게 간판 아래에 한글 자모가 붙어 있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이 카페의 테이블은 특이하게 PSL(Parallel Strand Lumber)로 만들어져 있네요. 실제로는 처음 만져 본 재질인데 스트랜드를 집성해서 거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상당히 매끄럽고 매력적인 재질이네요. 이 PSL은 상당히 고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겉만 PSL로 하고 아랫쪽은 MDF로 되어 있더군요.
3층에는 "한글 놀이터"가 있습니다.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니 상당히 재미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들어가면 한시간 마다 입장할 수 있으며,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하네요. 아들이 피곤한지 다음에 가자고 합니다. 아쉽네요. 다른 분들은 미리 예약하고 오시면 좋겠네요.
1층에는 주로 사무실들이 있는데, 한켠에 이렇게 "한글누리"라는 조그만 도서관이 있습니다. 쉴 겸 들어가 봅니다.
책장은 많은데 아직 비어있는 곳이 많네요. 언젠가는 채워지겠지요? 회전하는 책장이 인상적입니다. 가운데 사방탁자에는 훈민정음 복사본들이 있습니다. 가져와서 봅니다.
한장 한장 넘겨가며 아이랑 같이 읽어 봅니다. 사실 그러고 보니 훈민정음 첫장만 달달 외웠지 그 뒤로 무슨 내용인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도서관 창 쪽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저는 이런 가구만 눈에 들어옵니다. 요 이동식 테이블의 겉은 자작합판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에는 미송집성목으로 되어 있네요. 원가는 아끼겠지만 품이 더 들것 같습니다. ^^
이렇게 한글박물관의 첫 방문을 마쳤습니다. 첫 방문은 탐색전이라 생각하고 전체적으로 훑어 보았습니다. 아마 다음에 또 가서 즐길 것 같습니다.
집 근처에 이런 멋진 박물관이 또 하나 생겨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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