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옛날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곡해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만들어질지 제대로 평가받을지 의문이었죠. 시간이 지나 어느덧 그 영화가 개봉이 되었고 별점 테러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의 기세로 천만을 훌쩍 넘겼다는 소식에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더랬습니다.
사실 영화 "변호인"을 진작에 보고 싶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변호인의 예고편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찡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예고편만 봐도 이럴진대 극장에서 몰입해 보면서 눈물이라도 흘리면 40이 넘은 남자가 창피할 노릇이다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미루다가 변호인이 천만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매율이 탄력을 잃어갈 즈음 마눌님과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일부러 평일 첫 상영시간을 골랐습니다. 관객이 적기를 바라면서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관객에 깜짝 놀랐습니다.
영화는 두시간이 넘는 길이였지만 커다란 호흡 하나로 탄탄하게 엮여진 영화적 스토리는 시간이 너무 짧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영화는 별다른 기교나 특별한 장치없이 정공법으로 관객에게 호소하는 방식입니다. 흔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치의식을 가진 변호사가 고문당한 젊은이들을 접하고서 각성한다는 가슴 뜨거운 얘기입니다. 마치 민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이 열렬한 민주투사가 되는 과정과 비슷하지요.
사실 변호인을 영화관에서 보기 전 정말 많은 스포일러를 보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큰 동요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늦게 영화관에 간 것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치는 변호인 송우석의 뜨거운 가슴과 포효하는 외침은 제 마음을 왕창 뒤집어 놓았습니다. 송강호의 연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연기여서 더욱 좋았습니다.
아~ 노무현
그의 정치적 견해에 100% 동의하지도 않고 특히 그가 대통령 재직시에 했던 몇몇 정책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정말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인품이 훌륭한 정치인은 좀 있겠지만 뜨거운 가슴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정치인은 참으로 드문 현실입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은 더 큰 권력에 아부하고 시류에 편승하며 불의에 눈감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깁니다. 상식과 원칙을 내세우면서 설사 그것이 자신을 겨누는 칼이라 할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용기는 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그를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국민을 믿고 이를 이용하여 승리하는 법을 아는 정치인이라는 점입니다. "변호인"은 그의 인생 중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게 되는 정치인으로서의 초반부를 영화화한 것이지만, 사실 더 극적인 영화적 스토리는 5공 청문회, 3당합당 반대, 부산에서의 연이은 낙선,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의 감동적인 연설과 노사모 그리고 선거 직전에 일어난 정몽준의 배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세력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야 마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언젠가는 영화화될 것이고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성공 신화로 보여질 걸로 기대됩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무뢰배같은 언론과 정치인들에게 당하고만 살아서 참으로 답답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으로서 가진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언론의 자유와 정치의 자유를 묵묵히 보장했습니다. 그 결과 그것이 자신에게 비수로 돌아오고 다음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는 빌미가 되지요.
임기 중에 그렇게도 욕을 많이 먹던 그는 오히려 퇴임 후에 더 인기가 좋아집니다. 고향에 내려가서 집을 짓고 농촌 공동체의 성공 모델을 찾아가는 여러 시도를 하였는데 그 와중에 그를 보고자 집앞을 찾아오던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점점 더 규모가 커지면서 노무현과 국민들의 만남은 정례화가 되어 버리지요. 때로는 기념사진과 인사만 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때로는 토론과 강연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글쎄... 어느 세상에 이런 대통령이 있을까요? 권위를 버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기꺼이 관광상품이 되어 버리는 이런 정치인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불행히도 이런 놀라운 광경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더 큰 죄를 지은 다른 정치인들은 1~2년 잠수타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뻔뻔스럽게 다시 얼굴 내밀고 정치판에 나서지만, 그로서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수치였겠지요. 가슴은 여전히 뜨거웠고 자신에게도 가혹하게 들이대었던 상식과 원칙은 그를 오히려 궁지에 몰아 넣었습니다. 그는 "수치"라는 걸 아는 정치인이었고 "책임"이라는 걸 아는 정치인이었죠.
지금도 그가 조금만 뻔뻔했더라면...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렇게 불운한 영웅은 떠나갔습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찌질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더욱더 그가 그립습니다. 서민의 눈높이에서 서민의 말로 더러운 세상을 베어가던 그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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